연예인 발해, 그 이후 - 발해잔존세력 최후의 국가, 올야국 (上)[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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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124회 작성일 24-05-0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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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인 '정안국의 몰락과 연파의 재등장'


https://www.fmkorea.com/7004684278





에 이은 글입니다.





994년에 '올야'(연파의 세력을 의미)가 반기를 든 것이 '여진'에 의해 알려졌지만, 요 조정에서는 올야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는지,

혹은 시간이 없고 할 일이 많아서인지 딱히 올야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 시작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참고로, 이전 정안국 시절에는 여진과 정안국이 함께 행동하면서 마치 동맹이나 혈맹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요사에서 '여진'이라는 단어에 진짜 여진족을 의미하는 뜻과, 정안국을 의미하는 뜻이 있어서 그것을 일일이 구분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지만, '올야'라는 단어가 요사에 등장하게 된 992년부터는 그런 일 없이 '여진'은 순도 100퍼센트의 여진족을 가리키는 단어로 변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황당한 그림으로 그려진 행위들인, 같은 년도에 여진에게 조공받아 놓고 다음달에 여진을 치는 희한한 행위라던지, 여진을 치면서 조공을 받고 있는 웃긴 행위가 992년부로 싹 사라지고, '올야'라는 단어와, 요사 내에서는 요나라 내의 발해인들, 그들이 주축이 된 발해부 혹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발해 왕조를 가리킬 때에나 썼던 '발해'라는 단어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저는 992년 이전의 '여진'이라는 단어는 정안국과 진짜 여진족을 통틀어 칭하던 표현이라 생각하며, 992년 이후의 '여진'이라는 단어는 진짜 여진족만을 의미한다고 판단합니다.




그럼 왜 하필 992년인가? 갑자기 992년부터 여진이라는 단어 대신 올야라는 단어가 등장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우선 우리는 앞선 글을 통해 올야라는 지역은 연파가 요에서 반란을 일으킨 다음에 맞서다 달아나서 수비에 성공한 다음, 이곳에 알박기를 하여 세력을 키워나간 장소라는 것은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올야와 연파의 뒤를 봐 준 것으로 파악되는 정안국의 오씨 세력은 986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버리고, 자신들이 도와줘서 세력을 회복하여 웅거중인 연파의 올야국으로 가서 세력을 합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시기는 대략 988년에서 992년 사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이유는, 992년에 정식 명칭으로서의 올야가 처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전 편에서 989년과 991년에 정안국의 왕자인 오태원이 송에 사신을 보냈었고, 991년을 기점으로 사신이 끊어졌다는 기록이 송사에서 나옵니다. 이를 992년에 올야라는 호칭이 요사에 새로 등장한 것과 연걸을 지어 보면, 991년까지 버틴 정안국의 잔존세력들이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자신들과 연고가 있는 연파 세력에게 남은 힘을 모두 의탁하여 합류하였다. 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994년에 이르기까지 정안국 잔존세력을 인수하여 세력이 커진 연파는, 자신들이 받아들인 정안국 잔존세력의 수장인 오소도와 함께 요나라를 칠 것을 논의한 것 같으며, 정안국에 더이상 희망이 없어서 정안국 공중분해 당시에 정안국측 세력과 사실상 결별하게 된 여진이 이것을 알고(저놈들 정신 못차렸네, 또 요나라한테 짓밟히고 싶은거냐? 하는 심정으로) 요나라에 일러 바쳤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리고 연파와 오소도가 지휘하는 올야 세력은 요나라가 994년 말에서 995년 초중순까지 바쁜 틈을 타서 995년에 드디어, 20년만에 행동개시를 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개시의 타겟이 된 대상은, 요나라가 아니라, 발해 시절부터 발해에 강제합병당한 것을 원인으로 발해와 원수지간이었으며, 발해국 멸망 이후 정안국에게 툭하면 딴지를 걸고 그들을 괴롭히는 데에 앞장섰던, 요나라의 앞잡이 역할을 철저히 하던 철려(철리말갈)였습니다.




『요사』 13권 성종본기 4편 中


-통화 13년(995)가을 7월 초하루 을사일에 여진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정사일에 올야 오소도와 발해인 연파 등이 철려를 침략하여 해왕 화삭노 등을 보내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12월 기묘일에 철려에서 사신을 보내 매와 말을 조공으로 바쳤다.





물론 요나라가 아니라 철려를 친 것이지만, 철려의 상국이 어디인지를 모를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요나라에 다시 연파가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과거 975년에 연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늑장대응을 하던 요나라였지만, 20여년 전에 자신들이 놓쳐버린 자국의 반란자가 눈엣가시였던 정안국의 파편들까지 데리고 자신들의 수하인 철려를 공격하자 이번에는 더이상 좌시할 수 없었는지 빠르게 대응하기 시작합니다.




『요사』 13권 성종본기 4편 中


-(996년)여름 4월 갑술일(중략) 이 달에 해왕 화삭노와 동경유수 소항덕 등 5인이 올야를 토벌하러 갔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관직을 삭탈하였다.


-6월 신미일에 탄산으로 피서를 갔다. 철려에서 조공하였다.




요사의 이 기사를 보면, 무려 왕작을 가지고 있는 화삭노, 그리고 외척 끝판왕인 소씨가문의 유력자 중 하나인 소항덕, 그 외 5인의 사령관이 합세하여 올야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패배하고 돌아왔던 내용이 나옵니다.


이 화삭노와 소항덕을 제외하고도 5인의 사령관이 파견되었다는 것은, 이 때 올야를 공격한 요나라의 군세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선 이 사건을 서술해 줄 수 있는 열전 사료들을 몇 가지 가져왔습니다.




『요사』 88권 열전 18편 소항덕 항목 中


-(995년)도부서 화삭노를 따라 올야를 토벌하는데 아직 싸우기도 전에 올야가 항복을 요청했으나 소항덕은 그곳의 포로와 노획물을 노리고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올야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화삭노가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는 것을 논하자, 소항덕이 말하기를 "저들이 너무 드세기 때문에 우리가 조서를 받고 토벌하러 온 것이오. 아무 공도 없이 돌아가면 여러 부족이 우리를 뭐라 하겠소. 만일 깊숙히 공격하여 많은 노획물을 얻는다면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나을 것이오." 라고 주장하여 화삭노가 부득이하게 남동쪽의 여러 부족들을 찾아 공격하여 고려의 북쪽 변경까지 이르렀다. 돌아올 즈음에 길이 멀다보니 군량이 끊겨 많은 군사와 말들이 죽고 다쳤다. 이 일로 인해 공신 칭호를 박탈당했다.



『요사』 85권 열전 15편 야율노과 항목 中


-해왕 화삭노를 따라 올야를 정벌하다가 실패하여 금자숭록대부의 관계가 삭탈되었다.



위와 동일, 해화삭노 열전 中


-통화 13년(995) 가을, 도부서로 옮겨져 올야를 정벌하러 나갔다. 철려에 머무르며 몇 달동안 말을 먹여 기르다가 진격하여 올야성에 이르렀다. 그곳의 포로와 약탈할 것에 마음이 쏠려 (올야가)항복을 청하는데도 허락하지 않고 그들을 급하게 공격하였다. 이에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죽기로 싸웠다. 해화삭노는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부부서 소항덕의 의견에 따라 동남지구를 약탈하러 고려의 북쪽 경계를 순략하고 돌아왔다. 지역이 너무 먼 탓으로 군량미가 떨어져 군사와 말들이 죽거나 다쳤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봉작이 강등되고, 이후 죽었다.




『요사』 94권 열전 24편 야율알납 열전 中


- 통화 13년(995) 가을에 행군도감이 되어 도부서 해왕 화삭노를 따라 올야 오소도를 토벌하러 가서 몇개월 만에 그 성에 당도하자 올야 오소도가 항복을 청하였다. 화삭노가 그곳의 포로와 약탈의 이점을 노리고 사방에서 급하게 맹공격을 했지만, 올야 오소도는 군사를 거느리며 죽기로 지키며 곳곳에서 사납게 막아섰다. 그리고 성가퀴에 의지하여 허투로 전붕을 지어 우리 군사들이 기어오르도록 유도했다가 잠깐 사이에 지주를 철거하자 기어오르던 자들이 전멸했다. 화삭노가 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나려 하자, 소항덕이 말하기를, "군사가 오랫동안 출동했다가 공이 없으면 무엇으로 핑계를 할 겁니까? 국경 너머 깊숙히 들어가 크게 약탈하면 그래도 빈손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야율알납이 이에 말하기를, "깊이 들어갔다가 잘못되면 얻은 것이 잃은 것만 못할겁니다."라고 하였으나 소항덕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남동쪽으로 진공하여 고려의 북쪽 경계까지 이르렀다.(혹은 돌아왔다.) 길이 멀고 양식이 끊겨 군사와 말들이 많이 죽자 조서를 내려 모든 장수의 직함을 삭탈했으나, 알납만은 앞의 말로 인해 그것을 모면하였다.




우선 이 4가지의 열전들을 보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들이 왜 생겼는지 나오게 됩니다. 우선 시간별로 살펴 보겠습니다.

요사 성종본기에는 이 사건이 간략하게만 정리되어 있습니다.



요나라의 동쪽 지방, 동남쪽지방에 존재하던 세력들은 요나라에 복종하고 요나라를 섬기는 세력, 그리고 연파와 정안국 같이 요나라에 적대적인 세력, 그 외의 고만고만한 자신들의 세력을 꾸려 나가던 소세력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요나라가 자신들의 수하이자 자신들의 수족 역할을 하는 조공국인 철려를 구원하는 것을 늑장이라도 부려서 철려가 연파에게 당하기라도 하다가는 연파 세력의 확장은 둘째치고 요나라의 이미지와도 직관이 되는 문제라서 그런지, 그리고 여기서 패배라도 했다가는 소세력들이 죄다 올야와 연파에게 붙을 것을 고려해서인지, 이번의 요나라의 반응은 결코 느리지 않았습니다. 7월 정사일에 올야와 연파가 철려를 침략하자마자 요성종은 해왕 화삭노와 우리에게도 서희에게 낚인것으로 유명한 인물인 동경유수 소항덕(소손녕)을 보내어 바로 지원을 결정합니다.



우선 살펴보면, 995년 7월에 올야와 연파 세력이 철려를 침공하였으며, 철려가 이에 요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요나라는 이 때 철려의 위급을 구해주기 위해 바로 구원을 보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는 995년 12월에 철려에서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를 보면 알 수 있겠습니다. 저는 곧바로 요군이 파견되어 연파와 올야 세력의 침략을 저지해 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철려가 연파와 올야에게 짓밟혔으면 철려가 요에 조공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해화삭노 열전을 보면, 철려에 머무르며 몇달동안 말을 먹여 기르다 진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성종이 이들을 보낸 것은 파견한 것은 995년 7월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올야를 친 일로 처벌을 받는 것은 다음년도인 996년 4월입니다. 이 사이에 요군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 라는 의문은 해화삭노 열전과 야율알납 열전에서 대답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것을 모두 조합하여 짜 맞추어 보면,




995년에 성종이 올야의 토벌을 명했습니다.


7월에 파견된 요군은 즉각 철려를 구원하러 가서 철려를 지원하면서 연파와 올야 세력에 맞서 싸웠을 것입니다.

이에 연파와 올야는 놀랐는지, 혹은 요나라가 너무나도 신속한 반응을 보여서 그랬는지, 모종의 이유가 있었는지, 철려를 더이상 공격하는 것을 중지하고 퇴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해 12월에 철려에서 사신을 요나라에 보내서 조공을 한 기록이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올야와 연파가 철려를 공격한 것이 7월이라면, 그 소식을 들은 요나라에서 군을 편성하여 사령관들에게 맡기고 출병하고, 철려 지역까지 닿는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올야와 연파 세력은 철려에서 요에 사신을 보낸 12월의 이전인 최하 10월까지는 군대를 빼어 퇴각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연파와 올야 세력이 요나라의 대병력과 맞서 싸우지 않은 이유로는, 요나라의 국가규모와 병력은 연파와 올야 세력보다 당연히 컸으며, 올야와 연파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대패를 당하면 올야와 연파 입장에서는 미래를 기약할 것도 없이 다시 복구하기가 힘든 반면, 요나라는 타격을 입어도 회복이 충분히 가능하기 문이라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12월의 철려의 조공은 자신들을 구원해 준 요나라에 대한 감사의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서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우선 995년에 철려를 도우러 간 요나라의 장수들은 철려를 구원하고 나서 바로 올야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주둔하면서 철려를 보호함과 동시에 올야와 연파의 동향을 살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에는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부분이 하나 또 존재합니다.



『요사』 13권 성종 4편 中


-통화 13년(995) 겨울 10월, 무자일에 올야가 귀부하니 조서를 내려 유시하였다.




뜬금없이 올야가 995년 10월에 요에 항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열전에 올야에게 패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말입니다.

이걸 아무 필터 없이 보면 정말로 헷갈립니다. 사건의 순서가 뒤죽박죽이기 때문입니다.

20년동안이나 웅크려 있다가 기세좋게 철려를 침공한 올야가 침공을 한번 하고 별볼일 없이 갑자기 얼마 되지 않아서 10월에 항복을 요청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갑작스런 연파의 사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파는 이 시점 이전에 사서에 분명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75년에 요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후 올야로 도망와서 무려 이십년동안이나 힘을 기르고 다시 요를 공격할 정도로 연파는 요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요사 13권의 995년의 올야와 연파의 철려 침공 기사 이후에 연파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기세좋게 연파의 지휘하에 철려를 침공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큰 피해를 입지도 않았는데(이 뒤의 996년에도 요와 전투를 하여 이긴 것을 보면 올야가 이 때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갑자기 항복을 하겠다고 먼저 요청한 모습은, 연파가 살아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반란자는 결코 용서치 않고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죽인 요나라의 특성상, 20여년전 반란자라 할 지라도 연파는 여기서 항복하면 죽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므로, 연파가 살아있는데 항복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올야 세력이 철려를 침공한 다음 갑자기 철수해 버린 것은 요나라의 지원도 있었겠지만, 갑작스런 총사령관 연파의 사망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연파의 사망원인은 전사보다는 병사, 혹은 노환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야 세력+정안국 잔존세력의 수장을 맡던 정신적 지주인 연파가 사망하자 올야는 재빨리 철수한 다음, 요에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올야가 항복의사를 밝히긴 했으나, 위에 나온 해화삭노 열전과 야율알납 열전을 보면, 요군은 올야가 항복입장을 밝히고 요 정부가 접수한 10월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고 '말을 먹여 기르면서' 철려 땅에 계속 주둔해 있던 것으로 나옵니다.


아마도 요 정부 입장에서는 항복을 받아들였어도 자신들에게 몇 번이나 번복을 하면서 칼을 들이민 올야를 믿을 래야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며, 올야 역시 연파의 사망으로 인해 구심점을 잃어서 항복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이는 돌려 말하면, 연파 사후에 올야의 핵심인물로 남아있는 오소도의 리더쉽과 올야 내의 입지에 문제가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오씨 가문은 정안국의 폭파 이후에 올야 세력에 의지하러 간 것이기 문에 그렇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연파 사후 올야의 몰락과 분열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합니다.




여기에서 또 요사 특유의 개판 날림 기록의 고질병이 보입니다. 올야가 먼저 철려를 공격하고, 요군이 와서 올야가 우선 퇴각하고 올야가 10월에 우선 항복요청을 한 것은 나오는데, 그 이후에 후년 4월 이전까지 있었던 요군의 올야성 공격과 올야의 항복 시점, 화삭노에게 한 항복요청은 언제인지 확정지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서술하는 내용은 오류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립니다.


저는 두가지로 생각합니다.




우선 첫번는,연파가 죽고 오소도가 지휘하는 올야는 요에 항복선언은 했으나 10월기준으로 아직 내부는 하지 않았고, 요는 요 나름대로 올야를 믿지 않았기 문에 요군을 철려에서 철수시키지 않았으며, 그대로로 추가준비를 끝마친 해화삭노와 소항덕 등 7인의 사령관이 10월에서 4월 사이에 올야를 침공한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두 번째는, 올야가 항복을 요청했고 요성종이 그것을 받아들였으나, 소항덕과 해화삭노가 그것을 몰랐거나, 혹은 자기네들이 이득을 얻고 싶은 마음에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공격을 했을 가능성입니다. 열전에도 대놓고 소항덕이 포로와 재물을 얻기 위해 항복을 무시하고 공격했다고 적혀 있으니 이쪽 루트도 일리 있는 스토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둘중에 뭐가 맞는 것인지 아직 확실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요군은 올야에게 제대로 한방 먹었다는 것. 그것입니다.

7인의 사령관(해화삭노, 소항덕, 야율알납, 야율노과, 그외 3인은 표기 불명.)이 지휘한 요군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이끈 사령관 중 이름이 밝혀진 이들의 직급을 보면, 해화삭노가 무려 해왕+계성갈력공신에 행군도부서, 소항덕은 황실의 부마이자 동경유수, 야율노과는 금자숭록대부, 야율알납은 행군도감이었습니다. 이정도 지체높은 사령관이 이끈 병력이면 당연히 대병력이고, 적어도 10만 정도는 공격에 나서지 않았을까 하고 예측이 됩니다.





하지만 995년 7월에서 996년 4월 사이에 올야를 당당히 침공한 이 대병력은 위의 사료에 나와있듯이 어이없게도 올야에게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나오다시피 해화삭노와 소항덕에게 원인이 크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선 해화삭노 열전과 소항덕 열전을 보면, 싸우기도 전에 올야가 항복을 요청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저는 이게 사서에 나온 995년 10월에 올야가 항복을 요청한 것과 연관이 있다 생각합니다.) 이는 올야를 현재 이끌고 있는 오소도의 리더쉽이 별로라는 것을 방증하며, 동시에 야율알납 열전에 보면 공격하는 대상이 명백하게 '올야 오소도' 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리더였던 연파가 사망한 것이 확실하며, 올야 입장에서는 굴러들어온 돌인 오씨 세력이 리더가 되어 버린 데에 대한 내부불만요소도 존재했을 것이며, 대병력을 끌고온 요에 대한 불안요소가 많기 때문에 항복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이놈의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그냥 항복을 받아들이고 피 더 흘리지 않고 돌아갔으면 여기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해화삭노와 소항덕은 욕심을 부립니다. 이 둘은 항복을 제멋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포로와 재화 약탈을 노려서 항복을 받지 않습니다. 이에 올야는 태도가 180도 바뀌어, 오소도의 지휘하에 죽기살기로 요군과 싸워 성을 지켜냈으며, 예상외로 많은 피해를 보자, 소항덕은 자신들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는, 해화삭노에게 차라리 동남쪽으로 내려가서 약탈을 하고 뭔가 더 챙겨오면 자신들의 자존심도 챙기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고 꼬십니다.




올야성 하나도 지금 공략하지 못해서 패하고 있는데 적을 끝장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소항덕에게, 야율알납이 그러다가 더 큰일나면 그 어떡할 것인데? 라고 반론을 해 보았지만, 해화삭노 역시 불안을 느끼거나 약탈에 눈이 멀었는지, 소항덕의 의견을 따라 올야성을 내버려 두고 남하하여 고려의 북쪽 경계까지 '부득이하게'라는 부정적인 표현까지 나올 정도로 쭈욱 내려가 공격하여 털고 돌아오는 미련한 짓을 해 버립니다.



올야를 공격하라고 보낸 대규모 원정군이 치라는 올야는 치지 않고, 끝장내지도 못하고 패배만 거듭하다가, 그게 안되니 이제 등뒤에 있는 적인 올야를 내버려 두고 소항덕의 욕심으로 인한 약탈에 눈이 멀어 고려의 국경선 코앞까지 내려가서 신나게 약탈을 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 보면 해화삭노가 총사령은 맞지만, 이민족 출신일 뿐인 그에 비해 황실의 부마이자 거란 유력가문인 소씨가문의 적통이자 황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항덕의 입지가 더 강했으며, 이것이 결국 원정군을 말아먹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뜬금없이 고려 국경 앞까지 가서 약탈을 하고 온 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 터집니다.

해화삭노 열전, 소항덕 열전, 야율알납 열전에서는 공통적으로 길이 멀고 험해서 군량이 끊겨 많은 병사와 말이 죽고 다쳤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 뿐이었을까요?



등뒤에 있는 적인올야를 가만히 내버려두고 왔는데 올야가 그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무리까지 해서 고려국경까지 내려갔다 와서 병사와 말들이 고생하고, 식량 생각도 하지 않고 신나게 약탈을 해 대어서 스스로를 약화시켰기 문에 이를 노린 올야의 공격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예측됩니다. 아무리 길이 멀고 험하고 식량이 부족해도, 아무 공격이 없으면 당연히 군마가 다치고 상할 일까지는 대거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술이 되었다는 것은, 요나라 황제가 직접 올야정벌을 위해 보낸 대군이 정작 공격하라는 올야는 손도 못 봐주고, 쓸데없이 약탈이나 하러 돌아다니다가 올야에게 뒤통수를 맞고 참패하여 상당한 피해가 난 것을 커버 내지 축소하려는 서술로 보입니다.




저들이 귀국한 이후 야율알납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삭탈관직 당하고, 공신칭호를 박탈당하고, 금자숭록대부 직까지 빼앗긴 것으로 보면 요성종의 분노는 상당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 삽질에서 일어난 피해는 상상외로 컸을 것임을 직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소항덕의 고려 원정 실패와 더불어 커리어에 카운트가 되어, 결국 몇년 뒤에 소항덕이 아내가 아플 때 궁녀와 간통하여 황태후의 분노를 사서 사형되는 데에 한 몫 했다고 추측하는 의견까지 존재할 정도입니다.)



여튼 995~996년의 요의 올야 정벌은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끝나버렸고, 올야는 연파를 잃었지만, 요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제 그 승전을 지휘한 오소도는 입지가 강화되어 올야의 전성기를 이끌 것 같았지만, 이쪽 사정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후로도 올야 세력은 자신들끼리 분열이 났는지, 혹은 이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생각외로 컸는지,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요를 두번 다시 적대하면 자신들이 위태로워질 것을 직감했는지 결국 996년 10월에 이제는 진짜로 요에 내부를 합니다.




『요사』 13권, 성종 4편 中


-(996년)겨울 10월 무오일에 오소도가 내부하기를 간청하였다.



위와 동일


-통화 15년(997) 정월 계미일에 올야장 무주가 와서 항복하였다.




이 두 건의 사건을 보면, 오소도가 이기긴 이겼으나, 애시당초 20년 이상 결속을 자신들끼리 다져온 연파의 세력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거나 자신이 그곳에서 어우러지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이 됩니다. 더군다나 정안국을 말아먹고 연파의 세력에 의탁하여 살아가던 이들이 갑자기 올야의 리더가 된다는 것에 반발한 자들 역시 많았을 것입니다.


결국 올야 세력은 분열로 인해 자멸하기 시작했으며, 오소도는 결국 이 상태에서 요와 한번 더 싸우면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요에 내부를 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997년 정월에 올야의 장인 무주가 직접 와서 항복한 것 역시 올야가 연파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이후 분열되어 더이상 요에 대항이 힘들다는 것을 나타낸 사료라고 생각이 됩니다.





위와 동일


-3월 경인일에 올야의 오소도가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세시에 매,말,초피를 진상하는 것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생신 때와 정단에만 예전재로 바치고 나머지는 면제토록 하라고 하였다.




결국 요와 맞서기 힘든 상황을 인지한 올야는 수장 오소도가 직접 요에 가서 내부하여 항복하고, 요의 속령이 되었습니다. 요 역시 자신들에게 한방 먹이긴 했으나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올야를 생각외로 관대하게 받아 주었으며, 이로 인해 올야는 비록 요에게 고개를 숙이고 귀부하였지만, 요성종의 자비와 더불어 요 안의 복속세력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뒤에 또 다른 사건이 존재함이라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모두 짐작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끝나고 요의 속령으로서 조용히 편하게 살 수 있었으면 모를까, 우선 확실히 요나라는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올야를 자신들의 속령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조용히 받아주고, 조공품을 사정에 맞추어 깎아 주고 편의까지 봐 주는 등 나쁘지 않게 대하였습니다.


하지만.......과거 발해시절부터, 그리고 정안국 시기를 거쳐온 시절에 정안국-올야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다른 주변세력들 역시 요나라와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오히려 원수였던 요나라가 훨씬 더 자비롭고 관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건들이 이제 터지기 시작하면서 올야는 본격적으로 몰락하게 되어 버립니다.




다음편에 계속.






의문점과 논의점은 댓글에 달아주면 함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번 파트도 그렇고 정안국-올야 파트는 추측해야 하는 것이 매우 많기 때문에,

제가 하는 주장이 모두 맞다고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쓴 내용은 항상 말씀드렸듯이,

제 해석과 제 주장입니다. 아직 정확한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 역시 질문을 받을 때

완벽하지 못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또한, 이 글은 제 주장이며 학계의 정설이

아직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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